황제를 위하여 (1~2 세트) - 세계문학전집 51~52

저자
이문열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10-01 출간
카테고리
황제를 위하여 (1~2 세트) - 세계문학전집 51~52
책소개
“이문열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좋은 소설이며, 한국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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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친구 김모군의 오랜 추천에 힘입어 이틀만에 후다닥 읽어버린 책.

 

사실 작가 이문열에 대한 나의 시선은 많이 변해왔다고 생각된다.

중고교시절 처음으로 읽었던 그의 소설 '사람의 아들'이 준 강렬한 임팩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지적이고 나아가 현학적인 필력에 어느새 빠져들어버렸었고 종교의 근원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려는 소설의 깊이에 반했었던 기억이 난다. 고딩시절 일종의 냉소주의로 지적인 허세를 부리려던 나의 부끄러웠던 취향과 아주 잘 맞는 그의 글에 대한 애착은 이후 그의 소설중 허세킹;이랄 수 있는 '젊은날의 초상'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금시조' 등의 일련의 소설을 읽으면서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가 가진 동양적 전통에 대한 애착과 진보이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조금씩 느끼게 되면서도 여전히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던 와중, 대학교 1학년때 '선택'이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 '아.. 이건 좀 상식적이지 못한데?'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점에서 그게 자신의 선택이었다며 페미니즘을 나불거리며 나대는; 요즘 일부 여성들을 따끔하게 혼내는 조선시대의 한 부인의 모습은 그 자체가 넌센스로 다가왔고 그의 글에 대해 근원적인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오늘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 나서 혹시 '선택'도 실제로는 반어법을 사용한 블랙코메디였던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된다; 

돌아보면 강의시간에 유일하게 이문열을 옹호하던 용감했던 나의 친구 김모군은 꿋꿋이 토론에서 수많은 여학우들의 비난의 화살을 견뎌내며 자신의 논리를 펼치다 장렬히 스러져가던 눈물겹던 기억도 난다;;

 

아무튼 이문열 삼국지 이후; 나는 그의 저서를 멀리해왔고, 어느날 인터넷에서 '이문열과 젖소부인'사건으로 진중권에게 탈탈 털리던 그를 보면서 다시는 그의 글을 볼 일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정치평론가인양 행세하던 그에 대한 기억들을 지웠더랬었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이념이 뭐 대수냐'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래도 천하의 필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소설가의 글인데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아서 헌책방;에서 두 권을 구입하여 보게 되었다.

 

결론은 만족하고 있다. 격동의 세월을 거친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우화이자 심도 깊은 블랙코메디를 본 것 같아서 유쾌했다.

여기저기서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그의 보수적 시각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하고 운율을 즐겨보면 시종일관 이어지는 유장하고 고풍스러운 문체와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여러 동양사상에 기반을 둔 세계관이 독자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조선시대로 여행시키는 듯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아마도 우리들 핏속 어딘가에 흐르고 있을 조상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그 것에 조응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그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은 보람이 있었다.

 

내용은 구한말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정감록에 따라 자신을 황제라 여기며 평생을 살아간 한 남자의 일대기이다. 이 조선판 돈키호테는 한학과 유교사상 그리고 정감록등 도참사상을 비롯한 여타 동양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을 평생 지키며 스스로를 하늘이 내려준 황제라 믿으며 살아가는데 그 것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여타 다른 사상과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독자에게 큰 웃음과 더불어 여러 시사하는 바를 안겨준다.

 

작중 화자는 마치 삼국지를 읽는 듯 능란한 연의체를 구사하며 남조선 황제의 실록과 실제로 그가 처한 현실을 비교하면서 황제의 초라한 모습과 시대착오적인 황당함을 부각시키며 독자에게 웃음을 주다가도 한편으로는 좌익청년과의 설전에서 공산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논파하고 야소교 전도사를 논리로 내쫓는 등 서구에서 유래된 가치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에 대한 일침에도 어느새 귀를 기울이다가 마지막으로는 황제의 착하고 올바르고 논리적으로 미친;; 모습에 오히려 빠져드는 듯한 화법으로 변해가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후반부에서 작중 화자가 황제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연민을 넘어선 존경의 빛까지 느껴지는데, 이 황제를 민족의 지난했던 시기의 한가운데를 관통해가며 수많은 가치관들이 들어서고 무너지고 또다시 솟아오르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우직하게 과거의 전통을 지켜나간 그를 보는 작가의 시각이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무너져버린 역사와 가치를 이어가려는 그의 모습, 광인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그런 모습을 통해 우리가 이어가야 할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되짚어보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사상은 유불선도 기독교도 아니다.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라는 이제는 정치적으로 변질된 이름을 붙이기에는 턱없이 우스운 상황에서 현재 이 땅의 민중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는 딱 두가지일 듯 하다. 배금주의와 기회주의.

 

천하의 상놈들이 주머니에 돈푼깨나 쥐었다고 거들먹거리고 혹은 총칼로 권세를 잡았던 자들이 옷을 바꿔입어가며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그리고 백성들은 그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되기를 원하는 참람된 꼴을 황제께서 보셨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급속한 산업화로 유교적 가치관은 거추장스러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지 오래이고 90년대 동구권 붕괴와 함께 밀려온 현실사회주의 이념의 몰락은 길고 긴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를 말해주는 듯 했으나 IMF금융위기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금융위기는 더이상 시장을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는 우리를 이끌어줄 사상적인 끈은 지극히도 얕고 상스러운 것들 뿐이었다. 정글속에 내던져진 우리들은 생존본능 속에서 강자에게 굽히고 약자를 밟고 오르며 돈을 향해 달리고 달렸다.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근원한 것으로 오르고 올라도 달리고 달려도 그 두려움과 목마름은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사상과 철학의 부재. 그 자리를 돈과 이기심이 대체하여도 우리는 오히려 그 것을 찬양하고 부러워 시기한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오늘 읽은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감회는 남다르다.

우직하게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그는 남들이 보았을 때 미쳐있었지만 어찌보면 세상이 미쳐있었던 그 엄혹했던 시기에 오히려 그만이 순수했었고 인간을 아끼고 사랑했었고 지고의 가치를 추구하려했던 것은 아닐까.

 

이문열식 허무주의- 수많은 이들이 높은 뜻을 가지고 일어서고 다시 몰락하던 역사의 기록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인간을 물질이라는 토대에서 판단하려하던 공산주의나 민주라는 허울아래 자본가 독재를 행하던 자본주의나 그에게는 모두 역성혁명에 지나지 않았고 피지배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며 그들은 그것이 어떤형태의 것이든 지배자만 바뀔 뿐 반복되는 것이고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래서 혁명이나 민주주의보다 엘리티즘:통치자를 위한 학문을 더 중한 가치로 치는 이문열식 정치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문열은 짐짓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황제의 뒷모습에 자신이 배우고 익힌 선대의 가치들을 투영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지금에사 돌아보면 그 늙어버린 황제의 모습은 현대에서도 조선시대 시퍼런 유생의 가치를 받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보수주의 작가의 모습이었다. 스스로가 그 황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구시대의 유물을 미련할 정도로 소중히 받들고 평생을 지키게 만드는 그 '이념'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해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지켜야한다고 믿는 그 것에는 분명히 그만한 가치가 있고 타당함이 있다. 하지만 혼자 돈키호테가 되어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것은 조금 서글프지 않는가. 유교적 엘리트주의가 가진 한계는 헌법에 기반한 대중민주주의와 공존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유교를 정치의 영역에 무턱대고 가져다 맞추려는 것은 무척이나 무모하고 위험한 돌진이 아닌가 싶다. 그의 지난 돌진의 역사 속에서 민주화 운동도 쿠데타도 모두 하나의 스쳐지나는 바람이라 보는 듯 세상과의 불화를 스스로 만들어 왔다. 좋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때인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신념에 금을 내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뿐일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 선거철이 되어서 그런가 독후감에서 왠지 선동;의 내음이 난다. 그래도 몇달만에 써보는 글이라 무척 긴장된다. 암튼 잘 읽었다. 이문열 특유의 보수적 냉소주의;;만 제외하고 본다면 정말 깊이있고 유려한 문장의 바다에 헤엄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좋은 소설 중 하나라고 본다. 술술 잘 읽히니 한번쯤 가볍게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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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어쨌거나 씹덕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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