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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머리

일기는메모장에 2007. 4. 4. 08:22





봄이로군요.

그런데 이놈의 날씨는 참....

봄이 올 듯 말 듯 안 오는 참 뭣한 날씨네요.




봄 하면 가장 먼저 뭐가 생각나시나요?


짧아진 여성들의 스커트와


분홍빛 꽃잎;들과...



저는 어릴적 봄에 논에서 놀던 기억이 가끔 납니다.



바람은 여전히 겨울처럼 차갑지만 햇살은 졸릴 듯 따스한 날,


그게 제가 기억하는 봄의 느낌이었답니다.



마을을 둘러싼 논 가운데로 난 좁은 소로를 거쳐


한 키가 넘도록 깊은 개천의 방죽을 따라 걸어가다가


옆으로 다가선 철길과 만나 이어진 조그만 언덕을 넘어


저만치서 차들이 지나가는 국도를 향해 나아가면


멀리서 희미하게 학교의 모습이 보이던 그 길,



회색 갈대가 앙상하게 남아 바람에 흔들리긴 해도


굳어있던 땅에 푸른 빛이 조금씩 보이는 걸 느끼기 시작하면


논에 물을 대놓고 땅을 갈아야 하는 계절이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4월이 되면 이제 개울물의 온도도 조금씩 미지근해지고


어디선가 물땅땅이, 게아재비 같은 물벌레들과


피라미, 모래무지, 송사리떼들이 나타나 돌아다니기 시작하죠.



모내기를 하기 전 물을 대놓고 갈아놓은 논에 발을 들여놓으면


햇살을 받아 데워진 미지근하고 미끄덩거리는 그 느낌이 좋았었지요.


거기서 허리를 굽혀 손으로 송사리떼를 떠보기도 하고


조그만 민물새우떼를 잡아보기도 하며 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그렇게 잘 놀다 보면


기분이 영 불안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릇을 깨고 도망나온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 심부름을 잊은 것도 아닌데,



괜히 등 뒤쪽이 서늘해지면서


몸서리가 쳐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


저는 꼭 진흙속에 잠겨있던 다리를 들어올려보곤 했습니다.



역시...


그건 거머리였습니다.



햇살을 받아 번들거리는 어두운 청록색의 몸에


어느정도 배가 불렀는지 불룩해진 몸뚱이는


내 장딴지에 붙어 여전히 피를 빨고 있었지요.


그리고 거머리 주위로는 피가 흥건히 흘러내립니다.



거머리에게는 피를 굳지 않게 하는 성분이 있다죠. 


그렇게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들일 수 있게 창조해준 신의 은총이랄까요.



장딴지의 검붉은 피를 보면서 저는 조심스럽게 거머리를 잡아 떼어냅니다.



거머리의 입이 나의 다리에서 떨어지자


그는 몸을 둥글게 감아보려 하지만


이젠 배가 한참 불러져 감기질 않네요.



어찌보면 참 괴기스럽게 생긴 생물이 바로 이 거머리입니다.


밍크코트빛의 윤기나는 등짝과


청록색으로 빛나는 배쪽의 줄무늬를 보세요.


생활하면서 흔히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빛깔 아닌가요?



그리고 당겨도 당겨도 늘어나는 몸뚱이..


그게 참 매력있어요.



그 뱃속에 나의 피가 얼마나 들어있을까 궁금해하면서


나는 그 거머리의 머리와 꼬리를 잡고


양쪽으로 천천히 잡아당겨 봅니다.



한참을 그렇게 늘어나다가


인장강도의 한계에 부딪치면


그만 철썩 하고 뱃속의 검은 피를 흩뿌리면서


그놈의 몸통은 끊어져 버립니다.





거머리에게 피를 한 번이라도 빨려보게 되면


고여있는 물에 오랫동안 발을 담그고 있는 행위가


왠지모를 불안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거머리에게 피를 내주는 건 아프다거나 하지 않아요.


오히려 모를 때가 더 많지요.


어느순간 발을 보면 피는 흐르는데


거머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그 녀석은 프로입니다.



다만 싫은 것은


나의 피를 보아야 한다는 것,


그 괴이한 몸체를 상상해야 한다는 것,


결정적으로 왠지 모를 그 서늘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 누군가의 피를 빨면서 살아갑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저의 피를 빨리고 있겠죠...


그 것은 사실 본인이 지각하지 못한 채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을겁니다.



돌아보면 내겐 작은 상처와 남아있는 핏자욱 뿐,


그 실체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지요.



그게 일상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 알 수 없는 등 뒤의 서늘함이 느껴지는 순간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쾌함과 두려움, 분노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리고 그 것은 문득 문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되어


어느날 내 가슴에서 뛰쳐나오곤 합니다.



그래도 그놈은 한번 피를 빨면


몇 달은 조용히 살 수 있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디 그렇던가요.


평생을 가는 저주가 될 수도 있겠지요.






봄은 오고

마음은 싱숭생숭하여

불쾌한 낙서질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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