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여친도 없는 내가 뭐 뾰족한 수가 있나..
 
벌써 한달 전이었구나.
 
친구와 휴가를 맞추어 지리산으로 떠나기로 했었던게..
 
 
 
 
친구와 구례로 떠난건 12일 밤..
 
원래는 2박3일 종주를 해볼까 했으나
 
처음부터 종주는 무리라는 생각과 이러저러한 사정탓에
 
1박 2일 코스로 하산키로 하고 구례구행 열차를 탔다.
 
 
천둥치며 빗방울이 쉴새없이 떨어지던 서울의 밤하늘을 우울하게 바라보면서
 
이거 스틱에 벼락 떨어져 뒈지는 건 아닌가 내심 심각하게 걱정을 했었다.
 
 
그래도 미련이란건 어쩔수가 없어서
 
끊어놓은 기차표가, 20마넌짜리 배낭 질러버린 돈이,
 
그리고 이틀이라는 휴가가 너무 아까워서
 
이대로 뒷걸음치긴 싫었다.
 



 
구례터미널에서 구불구불 올라간 성삼재행 버스에서 내려
 
몰아치는 비바람에 덜덜 떨면서 노고단을 올라보니 새벽 5시 40분..
 
노고단 대피소 직원이 폭우로 입산통제중이라며 등산객들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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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보인다

 

비 더럽게 많이 내린다...
 
한 치 앞도 안보이는 운무와 비바람 앞에서
 
머 내가 할 수 있는건 코펠에 라면 끓여먹는 것 뿐...
 
조낸 맛있더라.
 
 
9시경에 입산통제가 해제될 수도 있으니 기다려 보란 직원의 말에
 
대피소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지도를 펼쳐보며 시간을 죽이고
 
친구놈은 매트리스를 깔고 코를 골며 졸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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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쿨..

 



결국 민족의 영산은 우리 잡스러운 놈들의 출입을 허락치 않았고
 
우리는 다시 터덜터덜 성삼재로 하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까..
 
그 유명한 화개장터;라도 가서 술이나 푸다 서울로 갈까?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다가
 
그래도 명색이 등산하러 왔는데 이대로 가긴 너무 아까워라
 
 
태극능선 종주코스의 일부인 만복대를 거쳐 정령치로 내려가서 남원으로 걸어보자고
 
이미 만사가 귀찮은 김대리; 모드의 표정을 짓는 친구를 살살 꼬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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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산에 또 가자꼬?


 
씹스럽던 표정의 친구에게 남원 아가씨들이 물이 좋다더라고 했더니
 
친구의 무겁던 발걸음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이제 다시 산행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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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 내려본 산동면 방향.. 그새에 무지개가 떴었나 보다

 
 
이제 고작 3년차 개허접 등산객인 내가
 
60리터짜리 배낭을 매본건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꾸역꾸역 우겨넣은
 
쌀과 햇반과 김치와 오이와 3분카레가
 
이렇게 무거울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무식하게 짐을 싸들고 온 내 자신에게 씨발씨발 욕을 하면서
 
정령치행 쟝글;을 헤치며 걷는 길은 쉽지만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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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말복날을 하루 앞둔 지리산의 능선자락은
 
턱을 덜덜거리게 할 만큼 추웠다.

 
끝없이 퍼부어대는는 비는 온몸을 다 적셔버리고
 
등산화마저 물이 차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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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안보여..



 
비오는 날 등산은 참 좆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짝에 도움이 안되는 우비는 고이 접어 배낭에 넣고
 
그냥 펑펑 비를 맞으며 길을 재촉하니 오히려 맘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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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구나


 
안개로 한치 앞이 안보이던 만복대에서
 
싸이;에 올릴 사진 한방 박고
 
추워서 버티질 못하겠으니 다시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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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다 정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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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치쪽 방향


 
정령치에 도착하니 성삼재에서 다섯시간 조금 안되게 걸렸구나.
 
 
 
정령치 휴게소에서 그간 못피운 담배를 피우며
 
저 아래 뱀사골쪽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삼천리 화려강산에 캐감동하기 보다는
 
이 높이에서 내려갈 생각에 그만 앞이 캄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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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방향


 
친구야, 비박 하지 말고 더 걷더라도 민박집에서 자자.
 
그런데 이번엔 친구가 당근을 던진다.
 
하지만 남원의 모텔에서 온수샤워를 한다면 어떨까?
 
온!수!샤!워!
 
 
발걸음이 빨라진다;
 
지금은 오후 세시가 얼추 되어가는 시간..
 
양말을 벗어 물을 대충 짜내고 정령치 하산로를 내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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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리 방향

 
인적없는 도로를 말없이 걷고 있자니
 
참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 와중에 재수없게 핸드폰이 터져서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음.. KTF도 산악지형에서 잘터지는군 하는 생각도 잠시;
 
 
아 씨발 기분 더러워.. 진작에 꺼놓을걸 후회를 하며
 
전화를 받고 나서는 핸드폰을 급히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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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씩 한걸음씩..

 
 
구불구불 급경사를 내려가는 2차선 도로는
 
묘한 즐거움을 준다.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날씨속에서
 
조금씩 아래쪽 마을이 시야 안으로 다가오는 기분이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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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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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국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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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들렸던 선유폭포






다섯시가 좀 넘어 절름절름 절뚝절뚝거리며
 
처음으로 나타난 휴게소 파라솔에 앉았다.
 
촌이라 그런지 길에 다니는 차도 몇 안되는구나.
 
 
맥주를 사서 캔을 딴다.
 
퍼붓는 빗속에서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며
 
들이키는 맥주의 맛은 남다른 운치로구나.
 
 
이젠 비고 뭐고 별로 상관 없으니까
 
다시 걸어보자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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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거릴 걸었어..

 
한참을 더 걸어보니 등장하는 민박집들..
 
여긴 도대체 한 마을에 집이 몇채나 있는걸까
 
썰렁한 폐광촌같은 마을을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어느 민박집 아주머니가 손짓을 하며 우리를 부른다.
 
 
어디 가냐고 물어보시길래 남원 갈거라고 했더니
 
때마침 버스시간이 되었으니 좀만 기다리면 버스가 올거란다.
 
민박집 처마밑에 앉으라고 하시고는 커피를 타주신다.
 
눈물이 왈칵; 날뻔 했다.
 
아유;; 고맙습니다. 담에 지리산 오게되면 구룡계곡 xx민박 꼭 들릴께요 아주머니
 
 
잠시후 우리는 버스를 탔고
 
아주머니는 잘가라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신다.
 
인심이 넘 좋으신 분인 듯...
 
 
 
 
버스기사 아저씨가 묻는다.
 
남원 어디로 가요?
 
여관이나 모텔 많은데 있어요?
 
모텔이요? ㅋㅋㅋ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있다 가르쳐 주겠댄다;
 

 
여튼; 그날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났고
 
우리는 여관에서 군장정리;하고 밥해먹고;
 
다방레지나 여관바리는 부르지 않은채;
 
그토록 그리던 온수샤워와 함께 평화로운 1박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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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코롬 댕겨왔어요. 30km조금 안되게 걸었나봐요.













 
그렇게 다음날 지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와
 
관광도시 남원을 그냥 스쳐지나긴 안타까워
 
 
춘향테마파크와 광한루를 들려 관광객 모드로 돌아보았는데
 
참... 커플이 오면 정말 괜찮을만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았더라.

 
특히 춘향;테마파크는 별 네개 반을 줄 만큼 잘 만들어놔서
 
다시 와도 좋을 만큼 깔끔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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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테마파크내 박물관. 멀티미디어를 적절히 사용한 구성이 이채롭다. 틀면 구성진 창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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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한 춘향전 뱅갈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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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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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년?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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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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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기생점고 해보고 싶은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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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테마파크와 광한루원을 잇는 승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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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뒷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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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5000원짜리 백반인데 정말 푸짐했음..





머.. 잘 다녀왔다.

친구는 다시는 등산 안갈거라고 한다.

나 역시 발에 물집이 한두군데가 아니긴 한데


처음 가보는 미지의 길을 걷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고...


어렸을 때 꿈꾸던 모험; 이란 것들이

혹시 이런 부류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근래 가보았던 산행 중에서 가장 알차게 1박 2일을 보냈던 것 같아

괜시리 뿌듯해진다.


기회가 된다면 여기서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해보고도 싶고;;

미련이 가득 남은 지리산 종주의 꿈 역시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슬슬 퇴근하고 싶어지는 저녁이 오니

몸은 알콜을 원하고

나는 이만 로그아웃을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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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어쨌거나 씹덕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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