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의 농 - 하늘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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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은 여길 누르셈

4일째 아침...
 
 
 

실은 전날 저녁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지리산에 갈 식량을 인근 하나로마트에서 사오면서
맥주를 두병 사온 것이 화근이었다.
 
 
 
 
 
아침에 모닝콜을 듣고도 피곤해서;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여덟시가 넘어 간신히 일어나 멍하니 있다가 시계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시간이면 예약해둔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죽었다 깨도 못가겠는데...
 
어쨌거나 일은 벌어진거니 느긋하게 생각하자며
온수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버스정류장에서 화엄사행 버스를 탔다.
화엄사 입구에서 버스에서 내려서자 급한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요 근처에 대통밥 정식이 유명하다던데..
휴; 오늘은 형이 맘이 좀 급하거덩?
 

계곡길을 따라 화엄사까지 올라가는 2차선 도로는
긴긴세월 수많은 관광객들을 받아낸 포스를 보여주듯
화엄사 앞까지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화엄사를 급하게 한번 둘러보고
화엄사내 해우소에서 급하게 싼; 후
입에 대충 먹을 것을 쑤셔박고 출동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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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대웅전


지리산 종주는 지난 여름 친구와 처음으로 도전했다가
몰아치던 폭우때문에 실패하고 애꿎은 남원으로 내려가
춘향 테마파크;에서 커플들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낸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지금은 겨울, 그리고 혼자이기에 더욱 안전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처먹을 식량도 넉넉히 샀고... 그런데 배낭이 좀 무겁긴 하다..
일단 최대한 빨리 노고단까지 올라가보자.
 
지도상으로 보면 화엄사에서 노고단 가는 길은 '코재'라 불리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4시간 거리라고 표시되어 있구나. 일단 가보자고.
 
 
문제는 어젯밤에 한 캐막장짓 덕분인가,
느낌상인지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리에 힘이 제대로 안들어갔다;
 
게다가 지난 사흘을 메고다니던 배낭무게에 익숙해져서인지
쌀과 라면을 더 쳐넣은 이번 배낭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실제로 서울 도착해서 사우나에서 무게를 달아보니 28kg이더라)
 

본격적으로 오른지 한시간도 안되어 속에서 불이 나듯 더워져
오리털 패딩은 가방속으로 바로 쳐넣어졌다.
(다음부터 이건 이틀밤 내내 베개로 사용되었다;)
 
 

다른 말은 필요없고... 존내 힘들었다.
그래도 주말마다 등산을 하면서 나름 수련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마에서 연신 구슬땀이 흐르고
거친 숨소리가 하악거리며 쏟아져나왔다.
 
아놔... 뭐야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역시 민족의 영산은 시작부터 내게 시련을 안겨주는구나..
 
원래 계획은 50분 걷고 10분간 쉬는 정통 군바리 행군으로 잡았으나,
실제로는 30분 걷고 10분 쉬는, 체력 깎아먹기 딱 좋은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지난 사흘동안 잘먹고 잘논 대가를 오늘 치르는 건가... 하악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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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넘어온 코재에서

 
결국 정말 지옥같았던 코재를 넘어 노고단 가는 도로로 올라선 것은
버스에서 내려 출발한 지 네시간 하고도 30분이 지난 상황이었다.
 
이 꼴을 자초한 내 자신에 대한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올라와
훨씬 걷기 편해진 길을 터덜터덜 숨을 고르며 따라 오르니
어느덧 노고단 대피소가 눈에 들어왔다.
 

다섯시간 걸렸다. 한시간을 더 까먹었구나.
시계를 보니 세시간 후면 해가 떨어질 것 같은데
초행길인 연하천 대피소까지 가는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단 밥부터 해먹자. 먹는게 남는거다.
취사장에 들어가 밥을 하고 뒤이어 라면을 끓인다.
라면 면가락을 빨아들이며 버너에 올려놓은 밥에 뜸이 다 들기를 기다린다.

 
맛있다. 맛있어.
밥이 약간 설익긴 했지만
지난 사흘동안 먹었던 그 어떤 밥보다 맛있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시발...ㅠ

 
대피소 직원에게 얘기해서 1박을 하기로 하고 대피소에 짐을 풀었다.
배낭에서 침낭과 매트리스를 꺼내 자리에다 깔아놓고 낙조를 보러 노고단 정상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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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낀 구름에도 불구하고 싸이;에 간지나게 사진을 올려보려 똑딱이를 들고 몇 방 박고 있노라니
이놈의 산은 지지리도 스케일이 크구나.. 정말로 웅장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람들이 이 곳을 왜 어머니의 품속과 같다고 묘사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늘은 비록 힘들었지만 내일은 적응이 되어서 좀 나을거야.. 그치??
맘이 좀 안정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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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서 전후좌우로 찍은 사진들



 
어린 초등학생 아들래미를 데리고 산행중인 아저씨와 대피소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다
'OO야, 우리 내일 내려가면 맛있는거 먹자' 하던 아저씨의 말에
나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짓게 되었다.
 
대피소내 숙소는 예상외로 따뜻했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누우면 바로 잠이 올 것 같았다.
목포에서 산 책을 오늘밤 읽는다는건 무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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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째 아침

 
 
밤새 부시럭거리는 소리와 늦은 밤 도착한 산꾼들의 얘기소리에 잠이 깊이 들지 못하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새벽 네시가 채 안된 시간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 것보라구. 딸;안치니까 이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는 것을;;
갑자기 내 자신이 으쓱해진다-_-;;
오늘은 한번 새벽같이 출발해보자.

 
 
짐을 챙기고 취사장에서 밥을 한다.
벌써 성삼재쪽에서 넘어온 양반들이 라면을 분주히 끓여잡숫고 있다.
신라면인듯 한 칼칼한 라면냄새가 코를 찌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밥이 좋다. 조선사람은 밥심이라는데..
 
즉석국에 두공기는 족히 될 것 같은 밥을 말아먹고
숭늉까지 끓여 보온병에 넣고 짐을 정리하고 나니 다섯시 반...
 
기온은 영하 15도 정도였는데 그닥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보자. 일찍이 가야 오늘중으로 장터목까지 갈 수 있지.

 
 
후레쉬를 켜고 밤길을 조심조심 내걸어본다.
연말에 눈이 많이와서 입산이 통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눈이 꽁꽁 얼어붙어 빙판이로구나.
스패츠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도로 집어넣고 아이젠만 끼고 앞으로 나간다.

 
기분좋다. 새벽산행은 이런 묘한 쾌감이 있다.
해뜨기 전의 어둑어둑한 길을 걷는 그 느낌은 청소부 김씨;가 아니더라도
새벽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묘한 기분을 한번쯤씩은 느껴봤을 듯 하다.

 
노고단에서 연하천대피소로 가는 길은 지루하게 이어진 능선을 타는 코스였다.
남쪽사면에서는 눈이 좀 녹아있다가 북쪽사면에서는 다시 빙판을 만나는식의,
하지만 능선을 타는 것이라 어제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었다.
 
 
내가 알고있는 산에서 빨리 움직이는 방법은 따로 없는 것 같다.
굳이 꼽자면 바로 페이스 조절 뿐.
 
허본좌처럼 축지법으로 산을 오르는 분도 물론 계실 수 있겠지만
산을 자주 타 온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두다리 달린 성인남녀의 속도에는 대부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차이를 낼 수 있는 이유들을 꼽아보자면
남들이 쉴 때에도 지치지 않을 만한 선에서 계속 걸어가는 것,
쉴 때도 물 한모금 마시고 숨만 고를 정도로 시간을 짧게 두는 것,
그리고 오르막을 오를 때, 느리더라도 내 페이스에 맞춰 쉬지 않고 꾸준히 오르는 것 정도일까?
 
일단은 그렇게 마음먹고 걷다보니 동쪽이 점점 밝아져 왔다.
아마도 노루목쯤이 아니었나 싶다.
쪼꼬바를 입에 조낸 쳐넣고 숭늉을 벌컥벌컥 마시고 닥치고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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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맞이한 일출

 
연하천 산장에 도착하니 출발한지 네시간이 지났다.
담배도 한 대 피고 이것 저것 줏어먹고 나니 몸을 식히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시동꺼지기 전에 다시 출발해보자.
 
 
가끔씩 산을 가다가 약간의 경쟁의식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앞사람을 따라잡게 되거나, 혹은 뒷사람에게 추월당할 때가 바로 그 때인 것 같다.
그럴때면 괜히 무리하게 속도를 내서 가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거 참 위험한 짓인데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아직 내가 많이 소인배인 관계로 자꾸 그짓을 자행하게 된다.
 
물론 돈많은 일부 아저씨들은 등산보다는 잿밥에,
곧 아이템; 맞추는 것에 경쟁의식을 느끼는 이상한 분들도 꽤 되는 듯 하긴 하다.
 
아이템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레고리 배낭, 마운틴하드웨어/아크테릭스 의류, 잠발란 등산화 등등으로
풀셋을 맞추면 200만원은 우습게 넘어가더라.
 
전문적으로 산을 타는 양반들이 아닌 다음에야 돈지랄일 뿐인데..
살 디룩디룩 쪄서 산은 더럽게 못타면서
장비는 조낸 비싼걸로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나는 열폭한다; 흑ㅠ

 
여튼 그건 그렇고 연하천을 떠나면서 나보다 5분정도 먼저 출발한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이;가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오던 페이스대로 최대한 빨리 벽소령으로 이동해야만
후딱 점심을 해먹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기에
아까 오던 속도대로 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그 젊은이가 무례하게도;
한손에는 스틱을, 한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팔자걸음을 걸으며
도로교통법 위반을 하고 있던 것 아니겠는가.
 
나는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하고 슥 하고 그를 스쳐지나갔다.
한참을 가고 있었을까.. 뒤에서 뽀득뽀득뽀득..
아이젠 눈씹어먹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그 젊은이가 갑자기 폭주를 했는지
조낸 빠른 속도로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아놔 색히.. 내가 너보다 먼저 가서 기분나쁘냐 ㅋㅋ'
이런 찌질한 생각과 함께 나도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근데 그 젊은이는 예상외로 뒤쳐지지 않고 여전히 그 속도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좀 짜증이 나면서 앞서 말한 경쟁의식이 솟구쳤다.
2시간 후면 벽소령이니까 두시간만 달려보자 시바..
 
페이스 조절이고 나발이고 다 무시하고 난 그 젊은이와 거리를 벌리려고
오르막을 씩씩거리며 오르고 내리막은 거의 뛰다시피하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뽁뽁뽁ㄱ복뽁뽁뽀각뽀각....
두시간 내내 아이젠이 눈밭에 박히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고
나도 살짝 미쳤었는지 귓가에서 들려오는 아이젠 소리가 멀어질때까지
정신없이 미친듯이 내걸었다.
 
한계에 달해온다고 생각될 즈음.. 벽소령 대피소가 보였다.
배낭을 벗어던지고 거친 숨을 고르면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두대 빨았다;
담배를 다 피울때까지 아직 그 젊은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이스...
 
 
어쨌거나 심호흡을 하면서 이 엄청난 찌질함을 가라앉히고
취사장에 가서 점심밥을 하기 시작했다.
귀찮아도 밥을, 그것도 햇반보다는 직접 내가 한 밥을 먹으련다.
 
쌀을 올려 놓고 밖으로 나와 뭉친 다리를 풀고 있을 무렵, 나는 문득 보았다.
그 청년은 벽소령대피소를 그대로 지나쳐
아까의 그 속도로 세석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것을.
 
휴.. 무섭다 저사람;;
계속 그짓거리 했으면 나 아마도 길바닥에서 퍼져있었을거야..
님 좀 짱인 듯;
 
 
노릇노릇 맛있게 눌은밥을 위장에 가득 채우고 다시 장비를 추스려 본다.
예순은 족히 넘어보이는 노부부가 조심해서 산행 잘하라고 인사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르신들도 즐거운 산행하십시오.
 
발걸음이 아까와 같이 가볍진 않지만
밥먹는다고 좀 쉬었더니 왠만큼은 회복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벽소령에서 세석 사이의 구간은 세시간 정도의 코스.
정신나간 짓거리로 체력을 까먹어버린 내게는 조금은 힘든 코스였다.
 
특히 선비샘부터 세석대피소 사이의 코스는 
아까 왜 그짓거리를 해서 힘을 뺐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만든 구간이었지만,
더불어 그만큼 충분한 시야가 확보되어 멋진 경관을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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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에서


봉우리에서 내려본 지리산의 아름다움..
특히 파이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지리산 남쪽의 산자락 위로 흰 안개가 피어오르던 모습은
마치 환타지 소설속에서나 등장할 듯한 장면 이었다.
 
그랬다. 힘들고 고생하는 만큼 더 좋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산에서 배우는 정직함이 아닐까.
 
 
이제는 쉴 때 쉬면서 체력안배를 하면서 가자.
힘이 조금씩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차근차근 봉우리 세개를 힘겹게 오르락 내리락 넘어가다가
 
영신봉 하산길에서 눈아래로 들어온
새하얗게 눈으로 덮힌 세석대피소와 맞은편 촛대봉의 모습은
알프스 어딘가를 연상시킬 만큼의 예쁜 경관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사진을 몇 장 박았다.
여기에 뽀샵질좀 하면 된장필좀 낼 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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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산장과 촛대봉


 
세석에서 두시간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딱 열시간 걸었구나.
다리는 그리 아픈지 모르겠는데 오른쪽 어깨가 상당히 아파온다.
짐이 한쪽으로 쏠린건가... 모르겠다. 귀찮다. 좀만 참지 뭐. 가자고..

 
세석에서 장터목 구간 역시 앞서 벽소령-세석 구간 만큼이나
볼 것이 많고 점점 높아지는 고도만큼이나 힘도 많이 드는 길이었다.
 
그래도 능선타는게 골짜기 타는 것 보다는 백 배 낫지.
힘들때면 어제를 생각해... 어제...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양희은의 '봉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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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30분, 정확히 12시간만에
출발지인 노고단에서 목적지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지리산 무박당일종주를 해내는 대인배들도 계시다지만
초행길인 내게는 나름 힘든 하루였다고 생각된다.
제대 이후로 12시간을 이렇게 내리 걸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아직까지는 쓸만하구나 ㅋㅋ 하며 흐뭇해 해본다.
 
예약을 확인하고 자리를 배정받고서 취사장으로 향했다.
시끌벅적하게 고기를 구워먹는 아저씨 아줌마들로 소란스럽던 취사장을 벗어나
매점에서 산 황도 통조림을 뜯어 소주와 함께 마시며 하루를 돌아본다.

 
오늘 수고했다 하윤아.
사실상 등산은 오늘로 끝난거야.
정말 수고 많았어. 정말로...
 
차가운 소주가 뱃속으로 들어오자
달군 바늘같은 취기가 번개처럼 등뼈를 타고 솟구쳐 오른다.
취한다...
내일이면 집에 갈 수 있으려나... 후후...
갑자기 집생각이 문득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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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6일째 아침.
 
 
 
 
장터목은 천왕봉 일출에 특화된 대피소다.
시간이 되니 알아서 불을 켜고 방송을 해준다.
나를 포함해서 개떼처럼 많은 인간들이 부시시 일어나
어제 먹고 떠들던 기운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지쳐보이는 모습으로 산에 오를 채비를 하기 시작한다.
 
 
몸이 영 좋지가 않다.
황도에다 쳐마셨던 소주 때문인지
밤에 속이 쓰려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다.
다행히 챙겨왔던 겔포스 덕분에 대충 넘어갈 수 있었지만
오늘 하루가 또 걱정이구나.

 
천왕봉 가는 길은 마지막 코스라 그런지 숨이 많이 차온다.
아직은 깜깜한 시간이라 언덕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한시간을 헐떡거리며 어렵게 정상에 올라
아직은 어슴푸레하기만한 일출을 기다려 본다.
바위 위로 떼지어 몰려 앉은 물개들처럼
꽤 많은 이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려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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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떠오르는 일출을 보면서
가슴속 저마다의 수많은 소원들을 이야기 하겠지?
 
나는 지금 다리도 속도 시원치 않으니
무사히 안뒈지고 내려갈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빌어야겠다.
내려가다 뒈져서 불효할 필요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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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조금 일찍 내려섰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던 지리산 일출이었기에
역시 해가 안떠오를 것은 뻔했고
빙판에 급경사라는게 뻔히 보이는 하산길을 수월하게 내려가려면
남들보다 조금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휴...
정말 매력없다. 중산리 코스.
바위와 급경사의 반복...
볼 것도 전혀 없고...
 
내가 비록 내려가기에 망정이지
이렇게 재미없고 험한 길로는 절대 안올라올거야.
무슨 지리산 단기속성코스도 아니고
이러다 무릎 나가기 딱 좋겠다.

 
혼자서 시큰거리는 무릎에 투덜투덜거리며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도 하며
어느새 중산리 버스정류장에 내려와 보니 10시 45분. 세시간 정도 걸렸구나.
 
진주로 가는 버스가 11시에 있구나. 진주에서 서울로 가야겠다.
하여간에 요번 여행은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혀요.
 
 
 
어쨌거나 2박3일간 나를 받아준 고맙고도 징했던 지리산과의 인연이구나.
다음 계절쯤에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화개의 벚꽃길을 걸어보고도 싶고
쌍계사로 해서 세석을 넘어 백무동으로 가보고도 싶은데...
내 처지에 조금은 무리한 바람이겠지? 안녕...
 
 

마지막 체류지 진주에서는
히딩크감독;이 다녀갔다는 비빔밥집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국으로 선지국이, 비빔밥 고명으로 육회를 올렸다는게 특이했는데
나름대로 전주가 아니라 진주에서 요런 비빔밥을 먹게 되서 감회가 새로웠다. 
큰 맛은... 잘 모르겠다.
 
뭐, 엿새간의 여행에서 가장 맛있었던 밥은
넷째날 노고단 대피소에서 해먹었던 약간 설익은 그 고두밥이었으니까.
...
 
 
 
 
 

다녀온지 이제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지난 일주일은 벌써 지난 과거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현실은 얄짤없다.
 
내가 정말 벌교에서 꼬막정식 2인분을 개돼지처럼 혼자 다 처먹고 비틀거렸었는지,
혹은 세석 가던 길에 그 끝없는 계단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었는지
벌써 가물가물 한다는게 너무 아쉽고 속상하다.
 
약발이 오래갈 줄 알았는데
내겐 겨우 사흘짜리였다니 한심하다는 생각만 가득하지만
 
다만 머릿속은 많이 깨끗해졌고 체력은 한층 강화된 것 같아
그나마 이걸로 다행으로 생각해야겠다.
솔직히 아무 생각없이 간 여행이었으니 이정도라도 얻어온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이제 다시 현실에서,
아니 사이버 공간에서 찌질거려 볼 시간이구나;

 
키보드에 힘을 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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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어쨌거나 씹덕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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