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나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었을까?

나름대로 돌아보면 스물 몇해동안 이런 저런 일들을 해보았지만

내 자신에게 심대한 변화를 준 일들은 없었던 것 같다.

경험은 수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약이 될수도 독이 될수도,

혹은 스쳐가는 경험 그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일테니까.



예전에... 쓰레기 청소할때 얘긴데...

요즘은 신문 나부랭이에서 연봉 3000;; 받는다는 대단한 일이라 불리기도 한다만

그건 구청소속의 상대적으로 나은 여건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이고..

실제로 용역회사의 환경미화 업무는 상당히 고되고 박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때는 나름대로 그 일이 살아가며 가장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 중 하나라고 믿었다.


힘든 일은 젊었을 때 해봐야 한다는 치기,

군대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이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택하게 했었다.


두 명의 작업원이 저녁 7시에 청소차 뒤에 매달리게 되면

새벽 4시까지 4~5회정도 쓰레기를 비우러 수색집하장으로 가야 한다.

계산해 보면 매일같이 두명이서 20톤 가량의 쓰레기를 비운 셈이다.



룰루랄라 신촌을 쓰레기차 뒤에 매달려 거니는 기분은 상당히 즐거웠다.

짬;이 이빠이 든 100리터들이 쓰레기봉투를 힘차게 차 안에 던져넣던 상쾌함,

달리고 던져넣고 달리고 던져넣기를 반복하던 아현동 언덕배기의 숨가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첨에 일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던가..

언덕 꼭대기부터는 차 뒤에 매달려 신촌역 입구까지 가는 코스였는데

기사 아저씨는 내가 타기도 전에 엑셀을 밟고 가버리는 거였다.


난 잠시 허망하게 쓰레기차를 바라보다가 미친듯이 달려서 차를 뒤따라 갔었다.

근데 그와중에 청소용으로 어디에선가 줏어 신었던 워커 한쪽은 밑창이 날아가 버리고;;;

천을 줏어다가 묶은 다음에 연신 '아씨발, 아씨발' 거리며 절뚝절뚝 뛰어가던 그 기억이란...

나중에야 아저씬 웃으며 그땐 내가 '금방 그만둘까봐 시험해 본거' 라고 하시더군...;; 헤헤;;



일하면서는 남들이 생각하는 부끄러움 같은 건 별로 느껴보지 못했다.

내겐 오히려 가게 아주머니들이 음료수를 건네줄때 느끼던 그 보람이 더 강하게 남는다.

새벽에 일이 끝날때면 들러 라면을 얻어먹곤 하던 어느 조개구이집 할머님의

푸근한 얼굴과 따스한 목소리는 지금도 무척 그립다...


가끔씩은 명절때 모모한 점포에 쳐들어가 금전적인 요구;;를 좀 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만..

그게 뭐 사람 사는 세상일이 다 그렇고 그런게 아니던가...-_-


사람들을 상대할때는 너무도 당당했다.

불법주차 해놓은 승용차 주인에게는 졸라게 쿠사리를 주고

차 대려고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는

쓰레기 봉투를 내던지며 욕지거리를 하면 대충 다 알아서 피해갔다.


사람들은 '똥이 드러워서 피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으니...;;

그야말로 우릴 막을 자는 그 누구도 없었던 거다-_-



가장 일하는데 곤란한 것들은 이른바 '제품'이라 불리우는

주택가의 작은 공장에서 내놓는 천쪼가리나 구두뒤축, 피혁류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의 무게는 허리가 휘청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했는데,

특히 구두뒤축 같은 경우는 적재과정에서 그 안에 들어있던

뒤축고무를 갈아낸 가루를 들이마시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때마다 목구멍이 타들어갈듯 따가워 끊임없이 기침을 해대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비맞은 천쪼가리가 든 100리터짜리 봉투들을 쟁일때는

그 압도적인 무게에 '이대로 죽고싶다-_-'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아..

종종 차의 뒤를 열어 적재함을 고압호스로 청소할때는

짬범벅을 온몸에 뒤집어써야만 했고 (으아... 생각만해도 오싹;;;;)


앞서 말했던 수공업 폐기물들을 차에서 내린 다음

거대한 컨테이너 안에 그것들을 다시 적재하는 일을 하고 나면

온 얼굴은 땀과 실오라기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아침에 학교에 갈 때 까지 검정색의 가래를 연신 뱉어내곤 했었던 기억도 잊지못한다.


서대문쪽의 모 빌딩의 쓰레기장에서는 구더기-_-가 워낙에 많아

쓰레기를 쓰레기함에서 꺼내고 나면

팔뚝에 허여멀건한 구더기 서너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글구 낮엔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는지라,

다른건 몰라도 손에서 나는 그 냄새만은 어쩔 수가 없더군.

강의시간에 내스스로도 느낄 수 있는 내 손에서 나는 시큼한 쓰레기 냄새..

후후...



일은 힘들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일하던 사람들과 2주정도 지나며 다들 친해지게 되었고

함께 일하는 작업원인 남도에서 올라온 19살짜리 양아치랑은 정말 친해져서

월급날 둘이서 신세타령하며 미친듯 소주를 들이붓던 기억도 난다.

가끔씩 거리에서 떨어진 지갑을 줍게 되면

기사아저씨와 함께 셋이서 돈을 뿜빠이; 하던 정감 넘치던 기억도 몇 번 있었지.


그래...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서교동쪽을 하시던 아저씨는 일이 끝나면 바로 새벽시장에 가서 야채를 가게마다 날라주는 일을 했다.

안 힘드세요 라는 나의 물음에 아저씨는 자식새끼 생기면 어쩔 수 없다고 대답 하시던 기억.

매번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무척 정감 있던 아저씨였다.

젊은 시절에는 쇠말뚝에다가 오함마질을 연속으로 50번을 해도 끄떡없었다고 자랑;;하던,

파리가 들끓는 사무실에서 연신 소주를 들이키던 반장아저씨의 따뜻함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고시준비하면서 밤에는 쓰레기 청소하던 신촌 모 대학 다니던 어떤 형,

떡치고 노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이던 성격좋던 내 런닝메이트,

월급타면 나이트에서 100만원씩 긁던 무개념의 양아치 형,

나한테 피라미드; 가입시키려고 애쓰던 어떤 개새끼까지...-_-



이제야 다 추억이 되버렸지.

그들을 보며 정말 많이 배웠다.

그리고 치열하게 사는 이들을 보며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지.

사실 진짜 쓰레기는 바로 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일을 낮은 일이라 생각했던 내 사고회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가장 컸다.

그들의 치열한 삶속에 그저 경험의 차원으로 접근한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내 생활방식이란 그야말로 나태와 안일함 그 자체였다는걸

그들과 함께 일했던 기간동안 절실히 느꼈고,

이러한 경험들은 나를 한동안 성실케 했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고 다시 과거의 나로 돌아오는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보같은 새끼...



후후... 난 어쩔 수 없는 놈인가봐.




그래도.. 어쩌다가 신촌기차역을 지나 굴다리쪽을 보게 되면

문득 어떤 반가운 감정이 나를 맞이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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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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