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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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해 온라인 검색어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된장녀'였다고 한다.

된장녀 논란으로 온오프라인이 후끈 달아올랐던 시기가 이미 올여름이었으니
이제 그 얘길 한다는건 좀 뒤늦은 썰인 것 같긴 하다.

초뒷북이긴 하지만 된장녀 관련 걸작 만화들을 낑궈놨으니 보실분은 보셈.







이런 만화로 살펴보았을때
대중들이 말하는 '된장녀'로 불리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품성이라 함은

1. 신분상승욕구
2. 허영
3. 속물근성
 
요정도로 요약될 것 같다.


뭐, 정신적으로 마초임을 부정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서는
된장녀 이야기가 뭇 남성들에게 단결투쟁;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되어주었기에
그들을 대놓고 비난하면서 모종의 은밀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기자의 말처럼 이 된장녀 논란은
남성과 여성간의 성대결이라는 말로는 그 설명에 한계가 있으며
이는 계급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개개인이 가진 취향의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스타벅스, 아웃백, 명품 기타등등의 선호에 대해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솔직히 우스운 일이라 생각한다.
쌍팔년도 대학가에서 영문이 들어간 옷을 입거나 양담배를 피우다가
미제국주의의 개;라고 삿대질 당하던 것과 이게 뭐가 다른 발상인가;

하지만 그 취향이라 함은
온전히 자신의 순수한 '기호'와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오늘 생각해 보려는 것은 된장녀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 혹은 우리들이 선택하는 취향이라는 것의 정체다.
나는 이랜드 오리털 잠바보다는 노스페이스 윈드브레이커가 좋고
프로스펙스 보다 나이키를 더욱 선호한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가? 마케팅의 승리? 브랜드 파워의 차이? 혹은 그야말로 밴드왜건효과?
개개인이 이처럼 갖고 있는 취향이란 것은 정말 개인적인 차이에 불과할까?

이러한 어떤 취향에 대한 선호는 계급간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고
이 것이 다시 체제를 유지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안점이다.

재즈를 예로 들어보자.
남북전쟁후 버려진 악기들을 줏어든 흑인과 크레올들이
그들의 애환을 자신들만의 밑바닥 정서로 풀어나간 음악이 바로 재즈의 시작이었다.

당시 백인들은 재즈를 저질음악으로 규정해 터부시 했었는데,
그들에게는 '클래식'이라는 자신들만의 성역을 상징하는 고급 문화가 있었다.
(지금도 오케스트라 등에서도 흑인 뮤지션들은 매우 소수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처럼 음악은 두가지로 구분된다;
내 처지에서 '응당 들어줘야 할' 음악과 조낸 짜증나는 '놈들만을 위한' 음악..-_-;;

그러한 음악적 "취향"은 당시의 계급적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짓는" 단서가 되었고
어느덧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걸맞는 음악이라 여기고 그것을 즐겨왔다.
이 것은 조폭마누라 보고 낄낄거리는 사람과
피가로의 결혼 보고 ㅋㅋ 거리는 사람을 보는 인식의 차이기도 하다.
머, 열거하자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취향은 사회적 통념으로 굳어지고 계급적인 특성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한편 오늘날 한국에서의 재즈는 어떠한 위치를 갖고 있는가.
교양있고 세련되고 쿨한 20~30대에게 잘 어울리는 '세련된' 음악적 취향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마도 소개팅 자리에서 브래드 멜다우나 빌 에반스에 대해 썰을 푸는 대신
"저는 이박사;를 좋아하는 음악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요"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이처럼 취향은 내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어지는 것이고 교육받는 것이고 강요받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취향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계급간 구별짓기된 차별화의 기제로 움직이게 된다.

다시말해 개개인의 취향이라 함은 계급에서 비롯된 후천적 요인이며
그 취향이라는 것을 통해 계급적인 차별을 은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섹스앤더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뉴요커의 삶과 문화라는 것이
어느덧 20대 30대 여성들의 준거가 되었다고 본다면
그들에게 그것은 상위계급의 문화이며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바가 된 것이리라.
그들은 그 것을 어떠한 거부감 없이 당연히 받아들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신분상승에의 욕망은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이들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상위계급의 문화로 여겨지는 것들을 따르게 만든다.
명품으로 여겨지는 브랜드를 통해 그들을 모방해가는 과정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며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그리 큰 차이가 없기에 그것은 아주 효율적인 방안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한정된 자본을 선택적으로 집중하여 사용하게 된다.
점심은 굶어도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먹고
구두쇠처럼 돈을 아껴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을 사는 소비행태는
그들에게는 어찌보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굳이 아도르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소비가 미덕이 되어버렸고
소비가 바로 자아실현의 하나로 여겨질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삶에서
과연 그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을까도 의문스럽다.


물론 상류계층의 이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도
충분히 쉽게 자신들만의 성역을 만들 수 있기에
그렇게 구별지어진 우리들은 또다시 그리로 쫓아가는(혹은 뒤쳐지지 않기위해서) 바쁜 걸음을 옮길 것이다.
어차피 그들의 이데올로기 안에선 우리들에게 편할 날이란 오지 않을테니.

결국 이러한 일상의 소비행위나 문화에 대한 미적 취향이란 것은
결코 자신의 순수한 취향이 아닌 구별짓기를 통해 발현된 문화적 기득권의 차이다

라고 부르디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인용해보며;;
오늘의 썰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된장녀라 불리는 이들의 취향이라는 것은
현재의 계급구조의 유지(지배논리의 유지)에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분명 같은 계급임에도 다른 계급의 다른 문화적 취향을 보이는 저들을 향해
계급간의 갈등구도 와중에서 대립을 택하기 보다는
손쉽게 상위계층으로의 편입을 꾀하는 모습에서 발생한 반감은
'허영', '사치', '속물근성' 등의 수식어와 함께 '된장녀'의 부름으로 공식화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이 땅에서
소비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지금의 상황 속에서
이땅에서는 자본을 통하여 뭐든 다 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렇게 취향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배를 꾸준히 불려주고 있다.

그로 인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된장녀'라는
어찌보면 마녀사냥에 가까운 분노로 표출이 되어버렸다.

자본에서 소외된 이들의 분노가 이상하게도 자본가들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동류계급에 속하는 이들(변절자?;)에게 향하는 것은
정말 이 체제가 가진 괴력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그렇게 분열되어가는 계급의 균열사이로 자본의 위력은
절대적인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좆도 살기 힘든 세상,
사회는 파편화되고 개개인은 도구가 되어
주말에 마트에서 소비하는 낙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그까짓 취향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하겠지만
그 취향마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자본의 힘이고 지배계급의 힘이기에
언제나 자본이라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나와 당신들이 취향이란 이름으로 자행해 온 소비행위들은
'당신은 소중하니까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기만이었던 것인데
결국 그것을 통해서 '남들과 다르게' 지배계급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혹은 대세의 흐름에 따르기 위해 어려운 형편에도 눈물나게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결국 가슴아프다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된장녀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 모두가 천천히 속물로 변해가고 있다는게 안타까울 뿐이지.
마땅한 대안은 여전히 알려진 바 없고
그렇게 우리는 슬프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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