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쉬는 날, 마포에서 실기시험을 보고나서 시간이 애매하여 중앙시네마에서 '파주'를 보았다.

인터넷에서 대충 스토리는 보았기에 설마 용1주골이나 모종의 야1설스런 내용을 기대하진 않았고
어느정도 예상한대로 몹시 우울한 영화였다.



지금부터 스포일러 시작.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맨 처음 느낀 점은 '아, 이건 여성감독의 작품이구나' 하는 것이었는데,
남자가 느끼기엔 생소하고 조금은 이질적이기까지 한 섬세한 감정묘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날더러 이상하다 너 마초아니냐 라고 한다면 머 할 말은 없다만.. 뭐 개인적인 느낌은 그랬다고.

난 이렇게 구체적인 설명이 적고 세밀하게 감정의 흐름과 변화를 읽어내야 하는 영화를 보면
정신적 피로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버리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나면 몹시나 피곤해지는 경향이 있다.
내가 뭐 영화를 자주 보는 것도 아니기에 다음엔 좀 쉽게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보려고 한다;

그리고.. 영화포스터의 카피 뽑은 양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1설 스러운 문구를 썼을까?
그러면 관객이 좀 더 들 것이라 생각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론 제발 좀 안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쨌거나 끝없이 바뀌는 시점과 그리 친절하지 않은 설명속에서
극중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흐름을 끊이지 않고 따라가려 하다 보면
어느새 이 영화의 희뿌연 매력속에 빠져버리게 된다.
몹시 우울한 영화지만 다시 보라고 하면 다시 볼 의향도 있는,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 되겠다ㅋ

그럼 이제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1. 이선균(중식)

그의 끝없는 부채의식에 답답함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공감한다.

무엇보다 예수쟁이+운동권이라는 그의 배경설정에서 근거하듯
한국사회에서 이런 옵션을 내보이고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야말로 착하고 성실하고 거짓없이 살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그런 이들에게 도덕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많고 그가 욕심껏 가질 수 있는 것은 극히 적기 때문에
그가 연기하는 답답하고 무기력하고 죄의식에 짓눌리고 본능을 억눌러야만 하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업보일 수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 역시 수컷의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가 파주로 도망치게 된 이유자체가 애딸린 유부녀에게 욕정을 느끼고 관계를 가졌다는 것에서 비롯되며
그는 그것에 대한 죄를 씻으려 노력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내가 아닌 처제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고
후반부에서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고백을 하고 그녀와 관계를 가지려 한다.

아씨발.. 이건 남자라는 존재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변혁과 어려운 이들을 위한 봉사와 약자들을 위한 헌신을 통해 평생을 바쳐온 그도
결국에는 발정나 눈이 벌개진 개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의 그러한 일련의 삶들은
그의 진심이라기 보다는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해 택한 고행이 아니었나 싶다.

중식은 자신의 감정에 한번도 솔직해 본 적이 없었고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봉사와 이타심으로 왜곡되어 드러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칭송했겠지만
본인 스스로는 자신이 택한 길이야말로 자신을 속이고 왜곡하는 끝없는 갈등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가 유치장에서 언급한 '길잃은 한마리 양'의 비유는 
결과적으로는 타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구원자로 은모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라 생각하면 좀 오바일까?

그는 그 사랑의 감정때문에 그 안개 자욱하고 음침한 그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자신을 구원해 줄 그녀를 기다리며
감옥에서, 그리고 철거현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며 힘든 고행을 하고 있었고
그녀에게 상처가 될 사실을 끝까지 숨기며 그것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끝내는 자신을 다시 한번 망가뜨리게 하는 부메랑이 되어버렸다.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 묵묵히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일하는 사람
그리고 서툰 단 한번의 표현, '너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표현이
다시 한번 그를 파멸로 내몰게 되는 아이러니는 참 슬프다.

그 후... 중식은 이제 다시 어디로 가야 할까?
모든 것은 다 그를 떠났고 그가 마지막까지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존재 역시 그를 저버렸다.
혹시 파주라는 도시 자체가 그가 존재해야 할 자리가 아니었던 걸까?
어쩌면 파주라는 그 도시는 그의 모든 것들을 야금야금 깎아먹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하기야.. 도망자에게 안식처란 있을 수 없을 테니, 파주가 아니더라도 그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이방인이었고, 은모를 통해 머무르고 싶어했을 뿐이다.
에효.. 써놓은걸 보니 그냥 한숨만 나온다;




2. 서우

'미쓰홍당무' 이후 그녀를 영화에서 두번째로 보는데 그녀의 연기력에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중의적이고 다중적이고 복합적인(정확한 단어를 못찾겠어서 그냥 주욱 나열해봤다;)감정연기가 극강이었다.
형부 중식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언니에 대한 죄의식이,
중식이 자신에게 가진 진실한 감정을 알고싶지만 언니의 죽음의 이유를 직시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그와 함께 있고 싶지만 도피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온갖 복합적인 감정의 덩어리들을
몇 안되는 대사와 그렁거리는 눈동자로 다 표현해내었다는 것이 놀랍다.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

그녀 역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
사랑의 감정은 죄의식이 되기도 하고 증오가 되기도 하고 도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알고 있지만 해선 안되고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가 될 것임을 알기에
그녀는 항상 불안해하고 그 진실에 다가가려 하다가 결국 도망치고 만다.

그녀 역시 중식의 등장으로 인해 파주라는 도시는
더이상 자신이 존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될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녀 역시 이 짙은 안개속의 도시를 도망쳐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을 잊을 수 있을까.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 역시 그런 뿌옇고 흐릿해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일텐데.




결국 이 영화는 인물의 감정흐름을 봐야 하는 영화인가 보다.
이 지독하게 꼬아놓은 변덕스런 감정의 흐름에 몸을 싣다 보면
순간순간 두 주인공의 마음 속에 들어가버린 듯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심한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

머물고 있되 머물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철거현장에도 수배자의 은신처에도 교회 공부방에도 존재한다.
서로에게 감정이 머물지만 머물러선 안될 사람들 역시 그 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진실은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지만, 알아서는 안될 진실도 있다.
감정은 솔직한 것이 좋지만 때로는 숨겨야 할 때도 있다.
이런 모순되고 복잡한 얘기들을 더 복잡하게 풀어낸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졸린 관계로 대충 정리하고 자야겠다.

안보신 분들은 한번 보세요. 
특히 좀 우울해지고 싶으신 분께는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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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어쨌거나 씹덕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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