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메모장에 2010. 3. 10. 00:09

정말 오랜만의 포스팅..


양희은씨의 번안곡 '일곱송이 수선화(Seven Daffodils)'




알았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내가 산을 다니면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다.
산과 들을 거닐며 지천에 널린 수많은 풀과 꽃과 나무들에 대해 알고 싶지만
한국의 야생화; 머 이런 백과사전같은 책을 끼고 돌아다녀봐야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

산에 같이 다니며 이건 뭐다 이건 언제 피고 어떻게 생겨먹고 어디에 쓴다라고 알려줄 수 있는
선생님같은 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참 아쉽기만 하다.

하기야 나처럼 생활이 불규칙한 사람이 그런 행운을 기대하는 것은 좀 무리일지도 모르지.




울 아버지는 꽃을 싫어했다.
나무도 주목과 같은 희소성이 있거나 효용가치가 있는 관목류를 좋아하셨지
나머지들은 톱과 전지가위와 낫에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어릴때 기억을 몇 개 되짚어보자.

초등학교 1학년때쯤일거다. 할아버지께서 아직 정정하실 때였으니까.
시골집 마당이 시멘트 블록을 경계로 화단과 갈라진 채 아직 허전하게 자리를 못 잡고 있을 즈음..
꽃을 좋아하시던 할머니께서는 화단 곳곳에 맨드라미, 과꽃, 봉숭아, 채송화 등등의 꽃들을 심곤 하셨다.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속이 편찮으셨던 할머니는 한때 양귀비를 뒤안에 몰래 키우시며 즙을 내 드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꽃들이 무성한 화단을 보며 뭐가 그리 못마땅하셨는지 매번 불평을 하셨던 것 같다.
주된 이유는 지저분하다;라는 것이었고.
뭐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야 겠지만.. 난 정말 잔인한 행동이라 생각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얻어와 심었던 무궁화 묘목도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몇년 못버티고 목이 날아갔던 기억도 나는구나;

어쨌거나;; 여름무렵에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로 꽃을 피우고 엄청나게 많은 씨앗을 뿌려대는 채송화는
쇠비름과(맞나?;)식물의 특성상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아버지가 무성해진 채송화들을 호미로 캐고 또 캐서 버려도
소나기가 한번 지나가고 나면 또다시 그 자리에서 살아나 꽃을 피우곤 했다.

아버지는 항상 마당이 지저분해진다며 이를 갈며 캐냈고, 채송화는 질세라 2~3주내에 다시 자라나 꽃을 피우던..
아주 지긋지긋한 천적관계였던 식물이었다;
난 아버지의 그 행동을 너무도 이해할 수 없었고 매번 가슴아파했던 것 같다;
뭐.. 이십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농약을 사용하여 박멸해버린 아버지의 승리다;

하나 더.. 내가 좋아하던 꽃은 메꽃이었다.
메꽃과(맞나?;)의 식물인데 나팔꽃처럼 진분홍이나 진보라의 어여쁜 색깔이 아니라
진달래꽃잎보다 옅은 연분홍의 꽃을 피우는 덩굴식물이었다.
그런 수수한 꽃의 빛깔을 나는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진달래 보다는 개꽃을, 나팔꽃 보다는 메꽃을, 코스모스보다는 패랭이꽃을 좋아했으니까.
아무래도 난 야생화 취향인듯;ㅋ

근데 이놈의 풀은 보통 밭두렁에서 자라나는게 일반적인지라 농민들 입장에서는 한삼덩굴마냥 잡초일 수 밖에 없기에
봄부터 가을까지 낫이나 예초기날에 작살이 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난 그걸 미리 캐다가 화단에 고이고이 묻어 물을 주고 키우곤 했었는데..
그게 잘 살아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식물은
내가 초등학교에서 캐온 국화다.
품종은 정확히 모르겠고, 가을이 되면 연보라빛 꽃을 피우는 국화인데
초등학교에서 분재를 하고 남아 버려진 국화모종을 갖고 집 화단에 묻었다가 살아난 국화였는데
원래 아버지의 낫에 날아갈 운명이었으나, 할아버지께서 '손주가 직접 심은 꽃이니 그냥 놔둬라'라는 어명에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이십오년이 지난 지금도 그 국화 모종은 가을이 되면 그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한 향기를 내뱉으면서
시골집 동쪽 화단가 한쪽을 무성하게 뒤덮고 있다.
아버지도 세월이 지나서는 향기가 참 좋다며 그때 안베길 잘했다고 하신다;


하나 더,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오래전 폐교되어 지금은 지역 초등교사들의 사택으로 이용되고 있는 나의 모교 뒤안은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꽃과 나무들로 무성했던 아름다운 공간이었던 기억이 난다.
매해 늦가을이 되면 그곳의 시들고 죽어버린 꽃나무들을 뽑아내고 베어내는 작업을 하곤 했었다.
4학년이면 고학년에 속하는지라; 나역시 그 작업을 했었는데
작업을 지도한 선생님께서는 일이 끝난 다음 원하는 만큼 꽃씨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했었다.
난 신이 나서 내가 가져갈 수 있는 한껏 수많은 씨앗들을 모아갔다.

난 편지봉투안에 씨앗을 넣어 서랍속에 감추어 두고
인고의 겨울을 보내며;
봄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모 후배의 표현 마냥 긴 호흡의 영업이었던가;;

여튼 봄이 왔고,
나는 세개의 화분에 흙을 고이 퍼담고
봉투의 씨앗을 나누어 묻었다.
물을 주며 떡잎이 올라오길 기다렸고..

그런데 결국 올라온 것들은 길쭉길쭉한 당근잎같은 코스모스 잎들 뿐이었다.
서랍속에서 다른 씨앗들은 다 말라죽거나 썩어버렸던 모양이다.
난 그토록 흔해빠진 코스모스만 살아남은 것에 분개하며 
화분흙을 탈탈털어 화단에 버렸던 기억이 난다ㅠ

그 이후로 씨앗을 심고 꽃을 키워본 기억은 없다;

후아..ㅋㅋㅋㅋ

그랬다. 어릴적의 나는 아마도
꽃을 좋아하는 건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그러한 내 취향을 억눌러왔었던 것 같다.

요즘처럼 취향을 존중받는; 시대였다면 대놓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튼 나는 몇해 전 향이 너무 거슬리고 벌레가 많이 꼬인다는 이유로
라일락나무를 밑둥부터 베어버린 나의 아버지를
지금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ㅠ_ㅠ;;;



머, 어쨌든간에;; 요즘 봄이 오는건지(오늘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지만서도;)
꽃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다.

얼마전 이사를 하게된지라 집안 곳곳을 수리하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조명기구와 콘센트등등을 사러 청계천을 들렀다가
지금은 한창 이전중인 종로5~6가의 화훼상가에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백합 알뿌리가 눈에 들어왔는데, 두개에 오천원을 달라고 하더라.
너무 사고 싶었지만 아직 집안꼴이 말이 아니기에 참았다.

다음주 쉬는날에는 꼭 사야겠다.

후.. 어쨌거나 난 원래 꽃을 좋아하는 센서티브한 초식남일까?;;;;;;

오랜만에 뭔가 올려보려니 두서도 없고 밑도 끝도 없고 참 난감하지만
난 아직 살아있지롱 하는 마음으로 일단 올려본다.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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