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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안도 유마. 그림은 아사키 마사시.

며칠전 1,2권만 빌려보다가 참지못하고 근래 발행된 21권까지 바로 읽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손을 놓지 못하는 재미를 갖춘, 근래들어 가장 재미나게 본 만화였다.

몇가지 부분을 놓고 약간 생각을 해보기로 하자.

#1. 일본이 그리워 하는 캐릭터, 쿠니미츠

강백호스러운 주인공, 무토 쿠니미츠는 상당히 일본적인 캐릭터다.

근성과 패기가 살아있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실천하며 배워가는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무엇보다도 과거의 전통적 가치들에 기반하여 현재를 변화시키려 하는 것이

그가 가진 매력의 본질이자, 작가가 오늘날의 일본의 미래를 그려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메밀국수장인과 폭주족이미지의 병존,

그러면서도 퇴폐적이지 않고 밝고 진취적인 이미지는

주인공을 전후 성장기의 일본의 원동력이었던

일본적인 근성-나는 이 단어 별로 안좋아한다만-을 소유한 인물이자

행동을 통해 매력을 발산하는 대중친화적 카리스마를 소유한 인물로 그를 창조해냈다.

쿠니미츠는 급속한 산업화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비판, 기성정치의 부패에 대한 분노에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의 음지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통하여

단순히 환멸의 대상인 정치가 아니라 참여를 통한 진보의 장으로서의 정치를 만들것을

독자들에게 외치고 있다.

아마도 내겐 이 만화를 읽을 세대인 청소년들에게 쿠니미츠와 같은 꿈을 갖길 기대해 보는

작가의 메세지, 그러니까 일본의 기성세대가 가진 메세지가 분명히 느껴져왔다.

버블경제의 거품이 사라진 후 역동성을 잃어가고 현실에 매몰되어가는 일본인들에게

철완 아톰처럼 힘을 줄 수 있는 캐릭터로 쿠니미츠는 자리매김 한다.

그리고 도전하는 젊은이에게는 쿠니미츠 처럼 행운이 항상 함께 할 것이라는 암시또한 그렇다.

어찌보면 소년만화가 가지고 있는 가벼운 교훈성이 극 전반에 걸쳐 얇게 덮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텐노헤이카를 외치며 과거로의 귀환을 외치던 우파들의 사고가

만화 전반에 걸쳐 희미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 만화가 읽는데 있어 약간의 불편함을 주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캐릭터가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게 되는건,

우리의 사회현실이 일본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일본정치의 현주소

하루끼 소설에서 가벼운 이야깃거리로나 언급되던 60~70년대의 적군파는

이제 일본에서는 그저 역사의 뒷이야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정치에서는 더이상 이념이라는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50여년간의 자민당 1당 체제,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민당의 통치,

그리고 자민당에 사실상 흡수되어버린 사민당, 그리고 존재의미를 잃은 공산당은

일본에서 이미 이념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해졌음을 의미한다.

극 중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단체와 연예인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플롯들은

일본정치가 이제 이념이나 정책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아닌

이미지의 정치가 주된 행태임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지독한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경제제일주의속에서 드러나버린 빈부격차,

현실을 냉소하는 젊은 세대들, 그러한 과정속에서 또다시 부패해가는 악순환 속에서

어떤 이념이란 것은 쓸모없는 논의에 불과하고 정치는 그저 그들만의 리그에 지나지 않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보여주는 어두운 부분에 대해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극중에서도 이념적인 논의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정책을 통한 승부, 그리고 정치적 수사와 테크닉에 대한 시연을 통해

독자들에게 정치현실에 대한 가벼운 맛보기를 보여주고

나름대로는 대중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단면을 들여다 보고 있을 뿐이다.

이념적인 논의는 누구를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가에 우선한다고 보는 나로서는

약간은 아쉬운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점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의 정치과정이 그들보다는 활성화 되어있다는 것을,

그들보다는 역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정치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점이다.

다만 우리역시 일본이 걷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은 지울 수 없지만.

#3. 민주주의는 존재하는가

쿠니미츠는 다분히 하층계급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다만 절망하지 않는 의지적인 캐릭터라는 것이 그 차이일 뿐.

그가 끝없이 경험하고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가는 과정은 지극히 대중주의적이다.

그가 직접 경험 속에서 비전을 열어준다는 설정은

일본만화속의 영웅들이 즐겨 쓰는 고전적인 레토릭이라는 생각도 든다.

작가가 지향하는 서사는 이 외모만 양아치이고

내면은 그네들이 원하는 전통적 모범 일본인 캐릭터인 쿠니미츠를 통해

그의 주장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협객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야쿠자 두목과 정원에서 맞짱을 뜨던 장면이었다.

그야말로 사나이의 로망;을 보여주는...)

쿠니미츠가 보여주는 카리스마적인 1인지향의 인물컨셉과 함께

민주성보다는 협객의 의리와 충성에 더욱 의지하는 그의 행태는 다분히 비민주적이다.

이는 그네들이 펼치는 대중지향적 정책과는 별개로 작용하며

어떠한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는 작가의 정치인식이 어렴풋이 느껴져왔다.


번번히 협객의 감성을 논하는 쿠니미츠의 언행을 통하여 보았을때,

결국 쿠니미츠의 정치의 토대가 되는 마인드는 지극히 동양적인 이상향에 머물러 있고,

이는 일본정치의 특징인 파벌주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눈치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우파적 논의에서 느끼는 불쾌감과 함께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카가미 료마라는 민주적 정치가와 후와 순이치라는 카리스마적 정치가 사이의 대조 사이에서

무토 쿠니미츠라는 존재가 내세우는 협의 정서와 그것과 대중과의 조합이 가지는

성공가능성,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것이다.


대중은 협의 모습을 지지한다. 그래서 협의 정서와 주장에 동조할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협은 체계화되기 어렵고 체계화 된다 하더라도 리더 중심의 강력한 위계체계를 형성하게 되어

기존에 타파하고자 하던 세력과 그대로 닮은 모양의 권력집단으로 변모해가게 된다.


민주주의는 모든것을 뒤바꾸어놓을 한 사람의 영웅을 기다리기 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늦더라도 그 안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카가미 료마라는 인물을 무척 좋아한다.


반면 쿠니미츠가 경험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원칙을 이미 체득하고 있다고 설정한 작가는

그를 만화라는 특성을 살려 대중주의적 영웅으로 설정하고 있다.


글쎄... 나는 그가 결국 자신의 왕국은 형성할 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가 보여주고 꿈꾸던 대중과 함께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러한 정치의식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가치의 권위적 분배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참여지향적 조정자의 모델로 정치행위를 바라보며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만, 어떤 영웅적 캐릭터의 도래를 바라는 이야기를 원한다면

이 만화는 흔한 영웅물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웅물 중의 하나인 듯 하다.


오히려 이 만화는 정치에 무관심한 청소년들에게 정치입문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

이 만화가 주는 과외 소득이라고 해야 할 것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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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어쨌거나 씹덕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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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속살

임지현, 삼인, 2001



-임지현 교수는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이고, 당대비평을 통하여 '우리안의 파시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등의 문제작들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 학자로서는 드물게 상당히 스타일리쉬하다는 느낌이 든다. 유려하고 개성있는 문체가 매력적이었다.
이 책에서는 앞서 언급한 저서들에 대한 세간의 비판과 지지에 대한 부연과 함께 자신의 주장들을 다양한 시각과 방식으로 총화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신체적으로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부파시즘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언급하고 그러나 그것이 미시화하여 '은폐된 억압구조로서의 파시즘'으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구 파쇼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를 통해 통렬이 비판하면서 한국사회 저변에 널리 퍼져있는 미시화된 국가주의와 파쇼적 민족주의, 또한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는 파시즘국가와 대결하던 사회주의 국가가 오히려 파쇼적 억압기제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하며 사회주의국가들은 권력의 획득을 위한 기동전의 승리와는 달리 대중을 대상으로 한 진지전에서는 참패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변혁의 성공을 보증하는 열쇠는 권력의 헤게모니를 민중의 헤게모니로 전화하는 진지전의 승리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지전의 승리는 곧 포괄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전선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문화는 물질적 실재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실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규정하는 코드이며, 그것을 통해 다시 물질적 실재 그 자체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힘이다. 그러므로 '진지전'이라는 문화적 전선에서의 승리가 담보되지 않는 권력의 장악은 과도적이고 한시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이 것은 파시즘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문화를 접수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벌이는 진지전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압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인데, 나 역시도 기계화된 사회구성체론 속에 상부구조와 토대로 사회를 이분화하는 사고를 해왔고, 그것을 통한 사회변혁이 조금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파쇼적 아비투스를 전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파시즘은 면면히 우리의 피 속에서 살아흐를 것이라는 현실과 직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거대한 이념을 통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현실의 미시적 측면에서 작용하는 아비투스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고, 그러한 미시화한 파시즘은 오히려 그러한 이념의 구체화 과정속에서 작동되어왔다는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구권에서 왜 극우파가 왜 창궐하는가' 하고 그가 묻는 질문은 자못 우리의 현실과도 맞아떨어진다. 박정희의 망령에 여전히 매몰되어 있는 한국사회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다. 국가주도의 동원체제속에서 선전과 교육을 통한 내면화과정을 통해 결국 자율화해나가는 과정은 파시즘이 원한 대중의 자발적 통제와 같은 그 것이었다.

가부장주의나 부계혈통주의가 혈통적 민족관으로 연결되며, 이는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념적 뒷받침이 되는 한국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할 수 있어야만 진정 근대를 극복하고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상당히 포스트모던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거대담론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해결책을 바라보는 근대적 사고로는 진보운동과 변혁에 있어 더이상의 발전은 물론 파시즘에 대한 패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면서 탈근대적 관점으로 이념을 권력을 문화를 해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약간의 원론적인 비판을 가하자면, 한국사회는 제도적으로는 독재를 벗어나 민주화과정을 이행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민주화는 여전히 먼 상태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념적인 폭이 지극히 좁고 보수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의 현실에서 이러한 탈근대적인 주장은 현실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오히려 후퇴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민주화를 향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이념적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곧 근대화가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불란서 68혁명을 논하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대로 문화적 측면의 민주화, 아비투스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안의 파시즘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운동세력역시 스스로 붕괴될 우려가 클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위로부터의 개혁논의를 비판하는 입장또한 문제가 있으며,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총괄하는 총체적 개혁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지적한 파쇼적 문화에 대한 문제점은 분명히 중요한 점이라 본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적인 통로로의 접근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통로라고 보인다. 포스트모던한 문화론이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의 상황에서 힘을 가지지 못한 문제제기에 대한 우려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일단 지금의 세대에 있어 거대담론에 대한 혐오감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 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지금, 맑시즘과 같은 거대담론은 뭔가 고루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부하면서도 결국에는 미시권력의 힘에 의해 자신도 알지못하는채로 움직인다.
'그게 바로 세상이야' 라고 말한다면.. 난 할말이 없다. 나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중요한것은 실천이지만 나역시 이렇게 떠들고만 있다.


이 책을 읽고 그런 우리안의 파시즘에 대해 인식하고 경계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대해 그저 위안을 삼기로 하자. 모순을 실천으로 전화시킬 능력과 용기는 이미 무기력한 내게서는 더이상 찾을 수는 없다.

어차피 책을 읽는 것 역시 지적 딸딸이 행위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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